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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이탈리아 이외의 오페라

by 인생을 지혜롭게 2023. 3. 30.

영국 오페라

영국의 오페라도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이탈리아가 새로운 표현법을 획득하여 눈부신 기세로 오페라를 발전시키고 있던 17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공화정이 실시되어 청교도들에 의해서 음악이나 연극은 눈에 띄게 탄압을 받았다. 극장은 파괴되고 음악회의 수도 줄어들어, 1660년경에 그토록 활발하던 음악 활동도 표면적으로는 정지해 버린 듯한 감이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프랑스의 궁정 발레를 모방하여 16세기말에 생겨난 음악극 마스크(masque)의 전통은 면면이 계승되고 있었다. 1660년, 왕정 복고 시대에 접어들어 음악 활동의 자유가 허용됨에 따라 영국 음악은 잠깐이긴 하지만 한꺼번에 꽃피게 된다. 사람들은 갈증을 풀 듯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을 수입, 자기 나라 나름대로 변용시켜 갔다. 알프스 이북의 도시에서도 오페라 분야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독일 오페라

17세기초의 독일 음악은 전반적으로 아직 뒤떨어져 있었으며,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종파 싸움에서 발단된 30년 전쟁에 의해서 독일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피폐해 있었으므로, 많은 경제적 뒷받침을 필요로하는 새로운 예술 형태인 오페라에까지 손을 뻗칠 수가 없었음도 사실일 것이다. 게다가 소국 분립 상태가 계속된 독일에서는 궁정 중심의 한정된 사회에서만은 오페라가 성할 수 있었으나 이탈리아에서처럼 서민층까지도 망라한 활기찬 것으로 자라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와서는 하노버에서 아고스티노 스테파니 (Agostino Steffani; 1654~1728)가, 드레스덴에서는 카를로 팔 라비치노 (Carlo Pallavicino; 1630년경~ 88)라는 이탈리아인이 활약했으며, 남부 독일 도시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가 비교적 유행했다. 한편 빈에는 안토니오 드라기(Antonio Draghi; 1634~1700)가 있었으며, 시인인 아포스트로 체르노(Appostro Czerno ; 1668 ~1750)나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968~1782) 등 재능 있는 대본 작가도 있었다. 그들은 나폴리파의 현실적인 줄거리의 전개 방식과 과장된 말재주를 배격하고, 전체를 유기적으로 통일시켜 가면서도 서정적인 아리아를 적절히 삽입한 뛰어난 대본을 많이 썼다. 실제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번영은 그들의 업적에 힘 입은 바가 컸다. 마침내 18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유도시 함부르크나 하노버 • 드레스덴 등지에서는 독일인 작곡가가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독일 특유의 맛을 띠는 이탈리아풍 오페라나 독일어에 의한 오페라도 작곡되기 시작했다. 드레스덴에는 요한 아돌프 하세 (Johann Adolf Hasse; 1699~1783)가 나폴리 파 양식의 오페라를 써서 일세를 풍미했으며, 시민 계급이 실력을 가져 상업적으로도 번영하던 항구 도시 함부르크에서는 라인하르트 카이저(Reinhard Keiser; 1674~ 1739)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인 독일 오페라가 황금 시대를 맞았다. 더구나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최초로 공개 오페라 극장을 개설한 도시기도 하다. 카이저는 오페라의 극적 표현력이나 관현악법에서 뛰어나며, 80곡 또는 120여 곡이라고 전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또한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 1685~1759)을 비롯하여 그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도 적지 않다. 카이저에 이어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도 함부르크 오페라계를 위해 상당한 수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차츰 목전의 흥미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져 결국 오페라 극장이 1738년에 폐쇄되었고 그 이후로는 다시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배적이 되었다.

프랑스 오페라와 발레

이러한 이탈리아, 오벨라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뿐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루이 13세(재위 1610~43), 14세(재위 1643~1715), 15세(재위 1715~74) 등을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절정기가 계속되면서 절대주의 왕권이 확립되자, 파리 및 왕가의 이궁(離宮)에 있던 베르사유를 중심으로 프랑스 취향이 물씬 풍기는 예술이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16세기말 이래 프랑스 궁정에서는 발레 드 쿠르(balle de cour ; 궁정 발레)라고 해서 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독창이나 합창과 기악 합주로 구성된 독특한 음악극이 존재했으며, 모두들 다른 나라의 오페라 동향에도 냉담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이 되자 드디어 프랑스에도 이탈리아 오페라가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독일이나 영국의 경우처럼 호의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오페라는 프랑스 식으로 덧칠해진 채 별개의 종류로서 자라갔다. 그 점에 있어 공적이 있는 이는 음악적으로나 처세술에 있어서나 유례 없는 재능을 발휘한 륄리였다. 장 밥티스트 퀄리 (Jean- Baptiste Lully; 1632~87)는 피렌체 출신의 이탈리아인이 었으나 14세 때 귀족을 모시고 프랑스로 와 곧 궁정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는 궁정 생활을 통하여 프랑스의 관습을 익히고, 차츰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1661년에는 젊은 나이에 왕실 음악 총감독을 맡아 프랑스에 귀화했다.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의 기초를 쌓아올렸지만 너무나 궁정에 밀착된 음악 성향으로 인하여 그의 시대가 지나자 급격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되었으며 또한 오늘날 작품을 재현시키기가 곤란해져 버린 것이다. 륄리가 죽은 다음 프랑스 음악은 차츰 로코코적인 경묘(輕妙)함을 찾게 되는데, 오페라 분야에서는 앙드레 캉프라(Andre Campra; 1660~1744)와 이론가로서도 명성을 날린 장 필리프 라모(Jean Philippe Rameau; 1683~1764) 등이 활약했다. 라모는 륄리풍의 오페라에 이탈리아 요소를 혼입하여 한층 더 세련된 훌륭한 오페라를 많이 남겼으나, 부르봉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화려한 프랑스 오페라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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